롯데 자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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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5년~1981년까지 있었던 실업야구 팀이자 프로야구 팀 롯데 자이언츠의 모태가 된 팀. 1982년 2월 12일에 프로 팀 롯데 자이언츠로 재창단되기 전까지 활동한 팀이다.
참고로 한국실업야구 팀은 연고지가 없었다. 주요 경기는 서울에서 펼쳐졌으며 주요 대도시를 지정해서 몇몇 경기는 지방에서 열리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롯데 자이언트도 연고지가 없었다. 연고지는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도입되었다. 이때 롯데는 다른 많은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서울 연고를 강력히 원했었다.
2. 명칭[편집]
롯데 자이언'츠'냐, 롯데 자이언'트'냐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당시 언론 기사를 찾아보면 두 가지 모두 사용된 명칭으로, 결론적으로 둘 다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일단 창단 준비 기사에는 둘 다 나온다. 다만 영문명은 창단 당시부터 Lotte Giants였기 때문에 롯데 자이언'츠'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롯데 자이언트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기자들의 착각인 셈.
5월 7일 동아일보에는 롯데, 야구단 창설 별명 자이언츠 감독엔 김동엽씨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선 롯데 자이언츠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5월 20일 동아일보의 롯데 티임 야구협회에 등록 기사에선 "한국실업야구연맹 10번째 가맹팀으로 "롯데 자이언트"가 19일 정식으로 대한야구협회에 등록을 끝냈다."라고 떠 있으며 7월 20일 일본선수 영입 기사에도 "롯데 자이언트"라고 등장한다. 1977년 기사에도 "롯데 자이언트"라고 언급한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1976년 기사 중간중간에도 롯데 자이언츠라는 단어들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둘 다 혼용해서 썼을 가능성이 있다.77년에는 아예 롯데 자이언츠라고 소개한 기사가 등장한다.
이런 혼합된 용어들이 사용되었지만 원년도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인 롯데 자이언트를 문서 제목으로 표기했다. 일단 나무위키 내에서는 현 롯데 자이언츠와 구분되는 의미로 실업 리그 당시는 롯데 자이언트로 표기하고 있다.
3. 역대 시즌[편집]
3.1. 1975년[편집]
1975년 3월 11일, 롯데제과가 야구단 창단 계획을 대한야구협회에 알려 왔다. 일각에서는 실업야구 창단 추진을 신격호 사장이 했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신격호는 실업야구단의 프로 구단 전환과 연고지에 대해서만 찬성했을 뿐이다. 그래도 실업야구단 창단 자체는 찬성했을 것이며, 당시 롯데는 이미 일본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실업야구단을 손쉽게 창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팀에도 일본의 야구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1975년 5월 6일 서울에서 창단식을 가지고 5월 20일 등록을 마침으로써, 대한야구협회에 10번째로 가입했다. 창단 감독은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실업 팀임에도 프로 팀을 지향하는 차원에서 팀 이름도 롯데 자이언트라 짓고, 일본 전지 훈련에, 자매 팀인 일본의 롯데 오리온즈(현 치바 롯데 마린즈) 초청이나 국내 최초의 여성 치어리더 응원단을 만드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1975년 7월 2일 선수단 구성을 완료했는데 이중 일본 출신의 재일교포 선수가 4명이나 된 것이 특이한 점이다. 닛폰햄 파이터즈의 언더핸드 스로였던 주동식과 주니치 드래곤즈의 백업 포수였던 카나야마(金山), 일본 사회인야구 도시 대항전 팀인 '사이노(西農) 운수'의 에이스 김호선, '산쿄정기(三協精機)'의 외야수 호시야마(星山)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는지 주동식과 김호선은 롯데에 입단하는 대신 일본프로야구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했다.
1975년 9월 20일에 실업야구 최초로 공개 테스트를 진행,# 광주진흥고의 박창수(투수), 대건고 박홍석(내야수), 전남고 조국현(내야수), 경동고 민경수(내야수), 선린상고 이수희(내야수) 등 5명을 뽑기도 했다.
또한 신생 팀에 대한 특혜로 1976년에는 대학 졸업생 유망주를 싹쓸이하며 팀 전력을 꾸리기 시작해 당시 실업 팀들 중 최강의 멤버를 자랑했다.
3.2. 1976년[편집]
1976년 한 해 동안 거둔 총 전적은 31경기 19승 4무 8패였다.[5] 춘계리그 3위, 하계리그/추계리그 우승, 부산시장기 4강의 기록을 세웠다.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트/1976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1977년[편집]
1977년 한 해 동안 거둔 성적은 61경기 38승 5무 18패를 기록했다. 부산시장기 준우승, 전기 2차 2위, 백호기 4강, 후기 1차 우승, 후기 2차 우승 등의 기록을 세웠지만 유독 플레이오프에서 약해 전기 통합 플레이오프 1승 2패로 탈락, 후기 1차 결승리그 1승 2패 탈락, 후기 2차 결승리그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트/1977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1978년[편집]
1978년은 조금 주춤했던 해다. 20승 3무 22패를 기록, 전기리그엔 8위였지만 후기리그엔 우승을 차지 코리안시리즈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쳤다.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트/1978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 1979년[편집]
1979년은 다이나믹했다. 21승 16패를 기록했고 1차리그 준우승[6] , 서라벌기 준우승, 그리고 코리안시리즈 우승까지 시작은 미미했지만 끝은 창대했던 시즌.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트/1979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1980년[편집]
실업 시절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다. 11승 24패 1무. 백호기 준우승을 제외하곤 부산시장기, 서라벌기 예선 탈락을 기록했고 정규 리그에서 승률이 50% 이상이 된 적이 전기 4차리그(2승 2패)와 후기 4차(2승 1무 1패)뿐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트/1980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1981년[편집]
1981년에는 다승왕, 최우수 신인 투수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최동원(206이닝 17승 4패)[7] 과 타격왕 허규옥(108타수 42안타 .389), 그리고 도루왕을 차지한 이해창(23도루)의 맹활약이 돋보인 시즌이었다.
특히나 계약금 3000만 원으로 당시 최고 금액을 받고 입단한 최동원에게 엄청난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고 최동원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팀이 기록한 36경기 324이닝 중 206이닝을 소화하며 17승 4패를 기록했고 탈삼진도 무려 173개를 기록해 1위를 기록했다.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트/1981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프로 전환[편집]
프로야구와 관련된 떡밥들이 실업야구 창단과 더불어 나왔으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1979년 신격호의 "한국프로야구 추진 계획"이 시작이었다.당시 기사
1982년 2월 12일 프로야구단으로 전환하며 연고지를 부산으로 정했다. 아무래도 옆 나라 자이언츠를 모티브로 한 만큼 수도 연고를 원하기는 했으나, 옆 나라처럼 수도에 연고를 둔 팀의 모기업은 미디어 회사여야 흥행할 수 있다는 MBC의 리그 발전론 측면에서의 주장과 당시 정권 실세가 MBC 사장으로 있던 상황이 겹쳐 서울 연고는 주장하기 어려웠다. 한 때 프로야구 창설 과정에서 동종업계인 해태제과가 프로야구에 참여하자 반대 급부로 서울 연고를 원했으나, 리그 기획과정에서 MBC의 입김이 강했기에 이 안은 애초에 거부당했고, 리그 창설을 주도한 측에서도 럭키금성을 끌어들여 부산 연고팀을 바꿀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서 서울 연고는 최종적으로 포기하게 된다.
참고로 프로 팀 롯데 자이언츠 창단 감독인 박영길은 실업 팀 롯데 자이언츠 마지막 감독으로, 감독 뿐만 아니라 당시 실업 팀 구단 관계자들은 그대로 프로 팀으로 자리를 옮겨갔다고. 단, 선수는 연고지 원칙 때문에 프로 롯데에 계승되지 않고 대부분 각자 자기 연고지의 프로 팀으로 갔다. 다만 1982년에는 세계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협회가 일부 우수 선수의 프로 전향을 막았고, 이 선수들 역시 다른 실업 팀으로 이적했다. 이 선수들은 대부분 대회가 끝나고 프로로 전향했다. 특히 부산/경남 지역이 연고지인 최동원은 프로로 전향하면서 다시 롯데로 돌아왔다.
5. 기타[편집]
- 축구 해설위원으로 유명한 한준희가 이 팀의 팬이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40년 넘게 롯데 자이언츠의 팬으로 살아가는 이유 역시 실업 롯데의 팬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2008년 10월 23일 이광용의 옐로우카드에서 직접 인증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에 걸쳐서 롯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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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0px"
롯데 자이언츠 앱으로 티켓을 예매하면 발신자 정보에 이 이름이 뜬다. 후스콜 SMS를 사용한 경우이다.
6. 역대 성적[편집]
- 진한 글씨는 정규 리그 성적을 나타내며 ■ 노란색 칸은 1위를 한 시즌이다. ■ 풀색 칸은 꼴찌를 한 시즌을 나타낸다.
7. 소속 선수[편집]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선수만 소개. 뒤에 연도는 소속 기간으로, 간혹 소속 기간 중 공백이 있는 건 군 복무 때문.
- 강만식: 1981
- 계형철: 1976, 1980~1981
- 김성호: 1978~1979
- 김인식[8] : 1976~1977, 1980~1981
- 김한근: 1979, 1981
- 남우식: 1975~1976, 1979~1980
- 박승호: 1980
- 손상대: 1976~1977, 1981
- 이해창: 1979~1981
- 정영기: 1980~1981
- 정현발: 1976~1981
- 차영화: 1976~1981
- 천보성: 1976~1977, 1980~1981
- 최동원: 1981
- 최정기: 1979~1981
- 허규옥: 1980~1981
8. 관련 문서[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00:13:10에 나무위키 롯데 자이언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당시 롯데 오리온즈의 로고를 변형한 것이다. 프로 전환 후에도 1992년까지 사용했다가 1993년부터 알파벳 G를 야구공이 가로지르는 로고로 변경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G라는 로고로 변경되었고 2017년까지 사용했다.[2] 창단은 롯데제과가 주도해서 이루어졌다.[3] 당시 한국실업야구에는 연고지 개념이 없었다.[4] 前 롯데제과 회장으로 신격호의 동생이다. 원래 신격호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 신격호와 양평동 롯데제과 부지 소유권을 놓고 대판 싸우고 난 뒤 롯데우유(현 푸르밀)를 들고 롯데의 울타리를 떠났다. 대를 이어서 형제가 싸우는 기업[5] 시범 경기나 친선 경기는 제외.[6] 1차리그 풀 리그는 4전 전승으로 우승, 결승리그에서 준우승.[7] 데뷔 첫 해 최우수상을 받은 건 77년 김재박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전기리그에서 거둔 13승 2패 중 12승을 최동원이 거뒀다.[8] MBC 출신 前 야구선수.